맞춤교육과 신앙진단
합동신학대학원 -이순근교수-
I. 왜 교회가 맞춤교육과 신앙진단을 해야 하는가?
들어가는 말: 사람들이 교회에 가는 이유는?
설교시간에 교인들에게 물은 적이 있다. "식당에는 왜 가십니까?" 물론 대답은 "밥 먹으러 갑니다" 였다. "미장원에는 왜 가십니까?" 여기에 대해서도 "머리하러 갑니다" 였다. "병원에는 왜 가십니까?" 에 대해서는 "병고치러 갑니다" 였다. 그런데 "교회에는 왜 오십니까?" 라고 물었더니 우물쭈물하면서 여러가지 답변이 나왔다. 어떤 사람은 "예배하러 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봉사하러 옵니다" 등이었다. 한가지 명확한 대답이 안나오는 것만 봐도 쉬운 질문은 아님을 알 수 있었고, 또 다양한 견해를 가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배나 봉사는 먼저 하나님을 만나야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신앙을 찾는 행위라고 한다면, 교회는 신앙을 얻기 위해서 나온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신앙을 얻기 위해서, 신앙을 찾기 위해서, 또는 신앙을 가지기 위해서 등 여러말로 표현될 수 있지만, "신앙" 이란 단어가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고 본다. 그렇다, 교회는 신앙 때문에 찾아오는 곳이다. 너무 단순화시켜서 표현하는 것이지만, 식당이 밥을 다루고, 미장원이 머리를 다루고, 병원이 몸을 다룬다면, 교회는 신앙을 다루는 곳이다.
신앙진단은 신앙을 진지하게 다루는 한 방법이다. 병원에서 환자가 찾아오면 치료에 앞서서 정확한 진단을 시도한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도 한 사람의 영혼이 찾아왔을 때 그 사람의 신앙상태를 진단해야 한다. 진단하지 않고 치료하는 병원이 있을까? 그런데 교회는 진단하지 않고 사람을 다룬다.
오래 전에 세계기능공 대회에 나가서 석공부문에서 금메달을 딴 우리나라의 어떤 사람의 인터뷰기사를 읽었었다. 오래 동안 기억에 남는 이야기이다. 그 해에는 독일에서 대회가 열렸는데 그 분은 대회 첫날 큰 장벽에 부딪혔다. 작업을 할 돌을 받아놓고 보니 생전 한번도 다뤄보지 않았던 돌이었다. 그 돌의 결이 어떤지, 강도가 어떤지, 석질이 어떤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옆의 사람들은 "시작"하라는 사인이 나자 마자 곧 바로 정과 망치를 들고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 분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 돌을 만져보고, 자세히 관찰하고, 쓰다듬어보고 하면서 거의 반나절을 보냈다. 그 동안 남들은 상당히 앞서 갔다. 확신은 없었지만 나름대로 그 돌의 성질과 특성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고 생각한 다음에 그는 작업에 들어갔다. 결과는 그에게 금메달이 돌아갔다.
오랫동안 교회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교회는 좀 더 한사람 한사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점이다. 성경은 그 점을 처음부터 명확히 한다. 골로새서 1장28절이다. 각 사람을 권하고 각 사람을 가르치고,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세우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신앙진단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구체적인 방법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와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하며 그/그녀의 신앙성장을 개인적 차원에서 돕는 방법이다.
포스트 모던시대와 맞춤교육
요즘을 포스트 모던시대라고 한다. 모던시대를 소품종 대량생산시대라고 한다면 포스트 모던시대는 다품종 소량생산시대이다. 라면만 해도 그렇다. 옛날에는 라면 하면 주황색 껍질의 S 라면 이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아마 100가지 쯤 되지 않을까 싶다. 소비자들의 다양한 기호를 고려해서 다양한 품종을 내 놓은 것은 가능한한 각 사람의 입맛에 맞춰보려는 노력이다. 세상은 이처럼 오늘 각 사람의 입맛을 고려하고 있는데 솔직히 교회는 아직도 대중을 상대로 신앙을 다루고 있다. LA의 한인타운에 가면 유명한 순두부 식당들이 있다. 가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손님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서 여러 종류의 순두부를 내놓는다. 매운 순두부, 보통 매운 순두부, 안 매운 순두부, 그리고 속에 넣는 재료에 따라 해물 순두부, 소고기 순두부, 섞어 순두부 등 다양한 종류를 내놓고 손님에게 고르라고 한다. 돈을 벌기 위해서 오늘 식당은 각 손님을 가능한한 개별적으로 대접하려고 노력한다. 교회도 이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
교회는 맞춤교육을 해야 한다. 맞춤교육이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교육방법이다. 본질적으로 교육은 맞춤교육이어야 한다. 교육역사를 보면 원래 교육은 도제교육과 같이 스승과 제자가 일대일의 인격적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었다. 그러던 것이 공교육의 시작과 더불어 점 점 맞춤교육에서 멀어져 갔다. 불가피한 일이었지만, 본질적으로 교육은 맞춤교육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각 학생 개인의 교육의 준비성과 이해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함께 교육을 시작한다고 해도 성취정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아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하나를 가르쳐 주면 하나를 아는 학생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하나를 가르쳐 줘도 하나를 못 깨닫는 학생이 있다. 이것이 현실이기에 그런 학생들을 한 교실에 넣고 일률적으로 가르친다는 것 자체가 비 효과적인 교수방법이다.
옛날이야기지만, 필자는 서대문에 있는 미동초등학교를 졸업했는데 6학년에 올라가니까 6학년이 23반 까지 편성되어 있었다. 필자는 18반 이었는데 선생님들이 모여서 회의 끝에 2개반을 분산시키고 21개반으로 재 편성하였다. 그 때 선생님들이 우리학교는 전교생이 10,500명이라고 하시면서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초등학교라고 말씀하시던 기억이 난다. 그 때 한반에 약 7-80명 가량의 학생들이 있었는데 교육이 제대로 될리가 없다. 담임 선생님 한분이 어떻게 그 많은 학생들을 개별적으로 교육할 수 있겠는가? 교육측면에서 볼 때 오늘 대형교회도 이와 비슷한 형편이 아닐까? 그렇다고 소형교회는 각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개별적, 인격적 교육이 실시되고 있는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대로 인력이 부족하므로 새로운 교인이 오면 전후좌우 별로 알아볼 시간도 없이 교회 일꾼으로 세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먼저 그 새로운 사람이 어떤 분인지 진단을 통해 먼저 알아본 후에 일꾼으로 세워야 한다.
세상의 교육추세
필자가 살고 있는 동네는 메릴랜드 주의 하워드 카운티이다. 이 곳은 한인들의 밀집거주지역이고, 한인학생들의 숫자도 전체의 10분지 1 정도가 된다고 한다. 이 곳에 오룩크 씨가 새로운 교육감으로 3년전에 오셨다. 그 분은 의욕을 가지고 교육혁신을 하고 계신데 그 중에 하나가 초등학교 1,2학년을 대상으로 영어와 수학을 개별지도 하는 것이다. 먼저 1, 2학년 학생들 대상으로 시험을 쳐서 각 학생의 영어와 수학의 수준을 판별한다. 그 결과를 가지고 평균수준에 못 미치는 아이들을 일대일로 선생님이 지도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눈높이 교육이요, 맞춤교육이다. 이 방법이 눈길을 끄는 것은 공립학교시스템에서 시도한다는 점이다.
사교육에서 아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칠 때 눈높이 교육을 실시하는 것은 이미 오래된 이야기이다. 수학은 암기과목과 달리 공식을 하나씩 단계적으로 터득해 가면서 배우는 학문이다. 그런데 초등학교 1학년 때 다른 학생들과 함께 배우기 시작했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뒤처질 수 있다. 그런 학생은 계속 새로운 공식을 배워도 이해하지 못한다. 반드시 앞의 공식을 배워야 다음의 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학에 뒤처진 아이들을 위해서 눈높이 교육이 나왔다. 그 아이 수준부터 다시 출발해서 수학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 일을 필자가 살고 있는 하워드 카운티에서는 공립학교에서 실시하고 있다. 참 좋은 시도이다.
영적인 진리야 말로 눈높이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일 설교를 준비하다 보면 답답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설교를 들을 대상들이 머리에 떠오른다. '이 장로님은 교회를 평생 다니신 분이신데 이 설교의 내용은 이미 다 아시는 것인데… 하지만, 지난 주에 처음 전도받아 오신 김 선생은 아무 것도 모르는 생짜배기인데 이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안해본 설교자가 있을까? 교회교육만큼 무계획적이고, 비효과적인 교육구조가 있을까?
참 목자상 (The Reformed Pastor)을 쓰신 리처드 백스터 목사님은 심방목회로 성공한 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 분이 심방목회를 하시게 된 데는 계기가 있다. 한번은 어느 교인과 개인적으로 만나 신앙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 분은 10년 넘게 주일이면 맨 앞자리에 앉아서 자기 설교를 귀 기울여 잘 듣는 성도였다. 그런데 막상 신앙이야기를 하다보니 가장 기본적인 진리와 교리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 때 리처드 백스터 목사님은 충격을 받는다. 자기가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고, 또 열정적으로 쏟아부은 그 말씀을 10년 넘게 잘 들은 그 사람이 배운게 없다는 사실은 그를 놀라게 했다. 그래서 그는 각 성도들의 집을 심방하면서 가장 중요한 교리와 진리들을 개별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것이 심방목회의 시작이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그의 심방은 한국교회가 흔히 하는 심방의 기능과는 다르다. 한마디로 그의 심방은 교육심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우리 한국교회가 새롭게 도입할 형태의 심방이라고 필자는 굳게 믿는다.
교회교육은 맞춤교육이어야 한다. 성도 한사람 한사람의 영적 눈높이에서 부터 시작하는 눈높이 교육이어야 한다. 그 점을 성경은 처음부터 말한다. 게다가 요즘은 포스트 모던시대이다. 사람들이 자기의 필요를 개별적으로 채움받기를 원하는 시대이다. 그런 점에서도 교회는 맞춤교육을 실시하여 성도 개개인의 신앙성장을 도와야 한다. 그리고 그 맞춤교육의 출발이 성도 개개인에 대한 신앙진단이다.
2. 신앙진단지 구성원리
지난 1월호에 게재되었던 글에서는 교회 내에서 맞춤교육의 필요성과 맞춤교육의 시작이 신앙진단이라는 점을 밝혔다. 이번 호에서는 필자가 신앙진단에 대해 관심을 갖게된 동기와 신앙진단지 구성의 원리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신앙진단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동기
필자는 92년에 한국을 떠나 시카고 근교에 있는 트리니티 신학교로 유학을 갔다. 하나님의 인도로 교육학을 공부하게 되었는데 공부 중에 후에 논문지도 교수가 된 페리 다운즈 교수로 부터 제임스 파울러의 신앙발달이론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 삐아제의 인지발달이론과 콜벅의 도덕발달이론을 참고로 하여 발전시킨 파울러의 신앙발달이론은 나의 흥미를 끌었다. 왜냐하면 목회자로서 현장에서 고민했던 것은 어떻게 하면 성도들의 신앙성장을 도울 수 있을까 였는데 신앙발달이론은 그 문제에 대해 한가닥 도움을 줄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논문주제로 파울러의 신앙발달이론을 택했고,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신앙진단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게 되었다. 그것은 슈나이더(Schneider)가 쓴 신앙발달과 목회적 진단(Faith Development and Pastoral Diagnosis)이라는 에세이( Craig Dykstra and Sharon Parks 편, Faith Development and Fowler, Religious Education Press, 1986년 간, pp221-250) 를 읽고 나서 였다. 그 때가 95년 가을이었다.
그 글에서 슈나이더는 진단자로서의 목회자(The Minister as Diagnostician)라는 책을 쓴 Paul Pruyser도 소개하고 있고, Anton Boisen의 목회적 진단인터뷰 질문지와 Edgar Draper의 인터뷰 질문지를 소개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질문지를 통한 진단의 목적은 목회적인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것이었다. 즉, 목회상담이라든지, 신앙적 성숙을 위한 진단이 아니라 심리적인 치료가 그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참고로 그 질문지의 내용을 몇가지만 소개해 본다. 먼저 Boisen의 질문지 중 삶의 철학이라는 항목아래 다음과 같은 질문을 묻고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무엇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무슨 이유로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을 본적이 있습니까?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그 분에 대한 당신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당신의 향한 그 분의 태도는? 당신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은 하나님 외에 다른 초월적 존재를 믿으십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a)해b)달 c)별들 d)물 e) 불 f)꽃들 g)나무들 h)바위들 을 보실 때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이어서 종교적 관심이라는 항목 아래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묻고 있다.
교회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교회에 정기적으로 꾸준히 다녀보신적이 있습니까? 어느 정도로 교회에 소속되어 있습니까? 예배에는 얼마나 자주 참석하십니까? 교회 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안간다면 안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당신에게 기도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기도가 당신에게 특별한 위로와 도움을 준 적이 있습니까? 특별한 기도응답의 경험이 있습니까? 우리는 어떤 문제를 놓고 기도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성경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당신은 종교생활에서 기복이 심했습니까? 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당신은 어떤 것을 시도해 보셨습니까? 특별히 종교적으로 각성했던 시기가 있었습니까? 혹은 심하게 실족했던 시기가 있었습니까? 언제가 종교적으로 가장 최상의 상태였습니까?
이상에서 본 대로 Boisen의 질문은 신앙적인 것이지만, 그 목적은 심리적 치료에 있음을 다시한번 언급하고 싶다. 그 점에 있어서는 Draper의 질문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그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1. 당신이 기억하는 최초의 종교적 경험이나 신념은 무엇입니까?
2.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이야기는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3.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귀절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4. 당신이 가정 좋아하는 성경인물은 누구이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5. 기도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만일 기도한다면 무엇을 위해 하십니까?
6. A.종교란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B.당신의 개인생활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역사하십니까?
7. A.당신 이외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B.당신의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하나님은 어떤 의미를 가진 분입니까?
8. 현재 어떤 종교적인 이념과 개념이 당신에게 가장 중요합니까?
9.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종교적인 행동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10.사람이 범할 수 있는 가장 큰 죄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11. 세상에 존재하는 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2. 사후세계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13.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세가지 소원을 말하라고 하신다면 어떤 것을 말씀하시겠습니까?
이상의 질문도 신앙적인 것들이지만, 그 질문을 통해 얻은 답변은 신앙지도에 쓰이기 보다는 심리치료에 쓰이게 된다. 그러나 필자는 이런 질문지들을 통해서 지역교회에서 사용될 수 있는 신앙진단을 위한 질문들에 대해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이 글 외에도 몇가지 다른 자료들을 통해서 신앙진단에 대해 도움을 얻을 수 있었는데 유감스럽게도 지역교회에서 성도들을 대상으로 또 신앙지도를 목적으로 하는 질문지는 찾을 수가 없었다. 거의 모든 자료들이 심리치료를 목적으로, 주로 병원에서 사용되는 것들이었다.
예를 들어서 어느 환자가 기독교 계통의 병원에 위가 아파서 입원을 했는데 밤에 잠을 못자고 악몽에 시달린다. 그 때 담당의사는 환자에게 원목을 추천한다. 원목은 그 환자를 만나서 대화를 하며 그 악몽의 원인을 찾는다. 그러면서 그 인터뷰 질문을 통해 환자의 정신세계를 탐방하고, 환자의 심리적 문제를 진단하고 치료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역교회에는 소위 '환자'가 오는 것이 아니고, 신앙의 구도자들이 온다. 그들이 신앙을 얻도록 도와주는 것이 목회자의 책임 중 하나라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그들의 현 신앙상태에 대한 정확한 진단일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신앙진단지이다. 우선 용어도 목회적 진단(Pastoral Diagnosis) 대신 신앙진단(Faith Assessment)이란 용어를 쓰기로 한다. 목회적 진단이 심리치료를 위한 것이라면 신앙진단은 영적성숙을 위한 것이다. 목회적 진단이 병원에서 하는 것이라면 신앙진단은 지역교회에서 하는 것이다. 목회적 진단이 주로 병원의 원목이 하는 것이라면 신앙진단은 지역교회의 목회자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그 때 부터 지역교회에서 사용하는 신앙진단을 위한 질문지를 나름대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한 기도내용은 이것이었다. "주님, 모든 목사님들이 영적인 청진기를 목에 걸고 목회하는 날이 오게 하소서!"
신앙진단지 구성의 원리
신앙진단지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 건강의 기준이다. 병원에서 건강진단을 할 때 여러가지 건강의 기준을 가지고 한다. 예를 들면 혈압을 재고, 혈당지수를 재고, 일분간의 호흡수와 그리고 몸무게도 잰다. 그리고 음식을 잘 먹는지, 잠은 잘 자는지 여러가지를 측정한다. 마찬가지로 영적건강을 측정하는 것인 신앙진단도 영적 건강의 기준들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야 말로 신앙진단지 구성에 있어서 핵심부분이다. 이 영적 건강기준에는 그 목회자의 신학과 목회철학이 반영된다. 신앙진단지를 만들 때 중요한 질문이 하나 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이다. 육적 건강의 기준은 혈압정상이고, 심장박동 정상이고, 호흡과 맥박 정상이다. 여기서 영적건강기준을 정할 때 두가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하나는 기준이고, 또 하나는 수치이다. 풀어 말하면 영적 혈압은 무엇이고, 영적 호흡은 무엇이고, 영적 맥박은 무엇인지 등을 결정해야 한다. 앞서 말했드시 이것은 목회자의 신학이 기초가 된다. 따라서 목회자는 영적성숙에 대한 분명한 입장정리가 되어있어야 한다. 그리고 기준이 정해진 다음에는 건강수치를 결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혈압은 80-120이 건강수치이다. 진단을 위해서는 객관적인 수치를 정해야 한다. 그런데 영적 건강진단의 경우 그 점이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 중의 하나이다.
신앙진단에 있어서 신앙진단지는 그 핵심이다. 정확한 진단을 제공하는 진단지는 지역교회에서 신앙진단사역을 위해서 필수불가결의 요소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계속 이야기 하도록 한다. 다음 호 까지 이 글을 읽으시는 목회자들께서 자신의 영적건강의 기준들에 대해 생각해 보실 것을 삼가 권한다.
3. 신앙진단의 기준
우리가 병원에 가서 건강진단을 할 때 흔히 기준으로 하는 것들이 있다. 혈압, 심장, 호흡, 체중 등 이것들은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다. 보다 심층적으로 진단하려고 하면 피검사를 통해 당뇨, 간염, 암, 콜레스테롤 등을 조사하고, 내시경을 통해 여러 장기능의 상태를 진단한다. 그 밖에도 초음파, CT촬영을 통해 보다 정확히 진단해 낸다. 의학이 발달하면서 진단 기준과 방법이 나날이 발달하고 있다. 자, 여기서 한번 생각해보자. 최초로 건강기준을 정한 사람은 누구이고, 또 언제일까?
그 대답은 아마 모른다가 아닐까 싶다. 언제 누가 정했는지 모르지만, 인류는 역사발전 속에서 경험에 의해서 건강한 사람은 심장박동이 튼튼하고, 호흡이 고르고, 식욕이 왕성하고, 안색이 좋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점점 의술과 과학이 발전하면서 새로운 건강기준들을 찾아냈고, 또 측정방법도 고안했으며, 수치를 통한 기준도 내어 놓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혈압을 생각해 보자. 누구인지 필자는 모르지만, 의학계에서 혈압이 건강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것을 주장한 최초의 사람이 있을 것이고, 또 그것을 수치화 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 사람은 대단히 천재적인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혈압계를 만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사람도 인류역사 발전에 대단한 공헌을 한 사람이다. 그리고 정상 혈압수치를 관찰을 통한 경험과 연구를 통해 제시했을 것이다. 요즘은 80-120을 정상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그 수치를 대수롭지 않게 말하기도 하고 듣기도 하지만, 생각해 보라. 최초로 그 수치를 정하기 까지 얼마나 많은 수고가 따랐을까?
영적 청진기를 만들 수는 없을까?
오늘 교회상황을 한번 생각해 보자. "건강한 교회" 라는 말이 이젠 일상화되다시피 됐는데 건강한 교회는 건강한 교인들이 모인 곳이 아닐까? 그렇다면 건강한 교인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또 건강한 교인인지 여부를 진단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기회가 있을 때 마다 목사님들이 모인 자리에서 물어보곤 했다. "목사님들이 생각하실 때 건강한 교인, 혹은 성숙한 교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 질문에 여러가지 대답이 나왔다. 예를 들면, 충성스런 교인, 헌금생활 잘하는 교인, 말없이 봉사하는 교인, 모든 공예배에 다 참석하는 교인, 예수님을 닮은 교인, 제자의 삶을 사는 교인 등등. 이 대답들 속에는 이미 기준들이 들어있다. 충성스러운 성품, 헌금수준, 봉사자세, 출석율 등은 진단기준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을 닮은 것과 제자의 삶을 사는 것은 진단기준으로는 좀 모호하므로 좀 더 측정기준이 되도록 구체화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의료계와 달리 목회와 교회세계에는 합의된 진단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의료계의 속사정은 필자로서는 모르지만, 아마도 거기에도 건강의 기준에 대한 이견이 있을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수치에 대한 이견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의 모든 의료진들이 받아들이는 건강기준과 수치는 존재한다고 본다. 그러기에 세계 어느 나라의 병원에 가도 기본진단은 동일하지 않은가! 솔직히 부러운 모습이다. 우리 교회세계에도 어느 나라의 지역교회에 가도 목사님들이 합의된 영적 건강기준을 가지고 성도들이 건강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도록 돕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상상만 해도 흥분된다.
청진기는 필자가 어렸을 때 병원에 가면 의사들이 사용했던 진단기구였다. 그래서 필자는 요즘 세상엔, 더욱이 미국 같은 곳에서는 이제 청진기는 사라졌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요전에 병원에 가니까 여전히 청진기를 사용하고 있다. 모든 지역교회의 목사님들이 목에 걸고 진단하는 영적 청진기는 존재할 수 없을까?
영적 청진기를 만들기 위해서 세계의 모든 목회자들이 다 모여서 회의를 하면 가능할까? 아마 수백가지의 청진기기 나올 것이다. 각자의 신학적 입장에 따라 영적 건강인의 기준이 다를 것이므로 합의된 청진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다. 의료계에서도 이름없는 많은 의료인들이 수고하고 연구하여 여러 건강기준들이 보편화 되었드시 신앙의 세계에서도 많은 목회자들이 나름대로 이 일에 동참하면 언젠가는 대부분의 목회자가 동의 하는 영적 건강의 기준과 그 것을 진단할 수 있는 청진기가 만들어 질 수 있으리라고 본다.
트리니티에서 찾은 영적 청진기
시카고 근교에 있는 트리니티 신학교에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테드 워드 박사님이 교육학 교수로 계셨다. 그 분은 수업시간에 칠판에 손모양을 그리는 것으로 유명하셨다. 그분을 발달론자이셨는데 학생들에게 각각의 손가락이 무슨 발달을 나타내는지에 대해 물으셨다. 그러면 학생들이 대답해 나간다. 엄지 손가락은 신체적 발달, 검지 손가락은 지적 발달, 중지는 정서적 발달, 약지는 사회적 발달이라고 하면, 마지막 새끼 손가락 하나를 남겨 놓고는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물으신다. 새끼 손가락은? 그러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신있게 "영적발달이요!" 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그 분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아니라고 하신다. 그러면서 도덕적 발달이라고 하신다. 사실 좀 충격적이었다. 왜냐하면 대학시절 기독교교육을 전공하면서 배웠던 것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대학에서 성도의 영적성숙에 대해 배울 때 눅2:52절을 소개 받았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여기에 근거하여 사람은 지적 발달(지혜가 자라가며)과 신체적 발달(키가 자라가며), 영적 발달(하나님께 더 사랑스러워 감)과 사회적 발달(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감)을 경험한다고 배웠다. 그런데 워드 교수님은 영적 발달은 발달의 한 측면이 아니고 전인적인 면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영적 발달은 손가락 중의 하나가 아니고, 손가락이 모두 모이는 손바닥이라고 하셨다. 참 새로운 이야기 였다. 특히 도덕적 발달은 로렌스콜버그의 도덕발달이론에 근거한 것으로 매우 흥미있는 측면이었다. 한국의 개신교가 양적으로 성장한데 비해 대형사회문제가 발생할 때 마다 교인들이 관련되는 것은 문제이다. 이신칭의를 강조한 나머지 이신칭의에서 출발하여 이신칭의에서 끝나는 감이 있다. 성경은 영적 성숙에서 도덕적 성숙의 측면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래서 트리니티에서 공부하는 동안 워드 교수의 영적 성숙입장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것을 영적 건강의 기준으로 삼았다. 일종의 청진기로 쓰는 셈이다.
하나의 제안
성도를 신앙적으로 진단할 때 건강한지, 또는 성숙한지를 알기위해 워드 교수의 기준을 쓰면 어떨까 싶다. 즉, 신체적으로 건강하게 발달하였는지, 인지적, 정서적, 사회적, 그리고 도덕적으로 건강하게 발달하였는지에 대해 진단해 보면 어떨지. 사실 필자는 성도를 볼 때 그 다섯까지 측면을 본다. 물론 신체적 발달은 다른 발달측면에 비해 영적 성숙과 그다지 밀접한 관계가 없다. 이 점은 테드워드교수도 강조하는 사실이다. 오히려 육체적 발달의 핸디캡으로 인해 보다 더 영적으로 성숙한 분들이 우리 주변에는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지적 발달도 비슷한 면이 있지만, 그러나 지적 발달은 조금 더 중요성을 지닌다. 워드교수는 삐아제의 인지발달 이론을 받아들이는 입장인데 삐아제의 인지발달이론은 사람이 어떻게 학습하는가에 대해 관찰을 통해 정리된 입장이다. 어렸을 때 배우는 과정과 어른이 되어서 배우는 과정은 다르다. '복음은 들음에서 난다' 고 하는데 이 때 듣는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영아구원문제와 정박아나 혹은 지적 능력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의 구원에 관해 조심스러운 것은 그들이 복음의 내용을 얼마나 이해했는지 모르기 때문이며,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구원을 전면 부정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경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복음을 듣고 이해하고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어느 정도의 지적발달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구원의 복음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 성숙에 있어서 지적 발달은 신체적 발달 보다는 중요하다.
요즘 EQ 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워드 교수도 정서적 발달을 중시하여 제일 긴 손가락인 중지를 정서적 발달로 규정했다. 그리고 사회적 발달에 가서는 에릭에릭슨의 심리사회적 발달이론을 적용한다. 그리고 앞서 말했드시 도덕적 발달은 로렌스 콜버그의 이론을 적용한다. 잠깐 빗나가는 이야기 이지만, 설교자가 청중들의 이 다섯가지 발달 양상을 잘 이해하여 설교의 포인트를 설정하는 것은 설교의 적응력을 높인다. 예를 들어 주님이 우리를 그러하시드시 타인을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점이 오늘 설교의 포인트라면 그것은 사회성 발달에 관련된 것이다. 사회성이 발달했다는 것은 자기와 다른 사람과 자기와 다른 의견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인데, 타인을 그 모습 그대로 용납하라는 것은 사회적 발달의 높은 단계에 대해 설교하는 셈이다. 설교자가 오늘 내가 설교하는 것이 다섯 측면 중 어느 면에 관계있는지를 알고 하면 보다 확신있게 설교할 것이다.
다시 돌아와서, 워드 교수의 다섯 손가락을 통한 인간의 다섯가지 발달을 영적 건강을 진단하는 기준으로 쓰면 어떨까 싶다. 이 성도가 신체적으로 잘 발달했는지, 지적으로 잘 발달했는지, 정서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잘 발달했는지, 그래서 전인적으로 볼 때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인지를 알아서 그에 적절한 신앙교육을 제공하는 것은 목회라고 본다. 물론 그것이 완벽한 기준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다만, 첫 출발로서는 적합하다고 본다. 필자가 워드교수의 입장을 건강진단기준으로 제시하는 것은 앞으로 관심있는 독자들과 활발한 토론의 주제로 삼으려는 의도에서 이다. 이 점에 동의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고, 또는 부분적으로 동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야 토론이 되지 않겠는가? 물론 기도와 말씀, 그리고 전도와 교제 등도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얼마나 기도하는가? 얼마나 성경을 읽고 실천하는가? 얼마나 전도하는가? 얼마나 교제하는가? 등도 훌륭한 영적 건강을 진단하는 기준들이 될 수 있다. 어쩌면 이런 기준들이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부담없이 받아들이는 기준이 될 것이고, 목에 거는 영적 청진기가 될 것이다. 하지만, 한가지 아쉬운 것은 학문적 뒷 받침이 약하다는 점이다. 앞으로 이 분야에 대한 보다 많은 학문적 연구가 요청된다.
어떤 것을 영적 건강의 기준으로 할 것인가는 목회자 각자의 몫이다. 연구와 기도하면서 나름대로 선택하여 영적 청진기로서 목에 거는 것도 역시 그/그녀의 몫이다.
4. 신앙진단지 사례
이제 신앙진단지에 대해 언급할 차례가 된 것 같다. 97년 경부터 필자는 신앙진단지를 만들어서 시카고에서 교회를 섬길 때 사용해 보았다. 그러다가 2000년 8월에 현재 시무중인 벧엘교회로 부임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사용해 보고 있다. 현재까지 이 신앙진단지를 통해 진단해 본 숫자는 약 300여명이 넘고 있다. 이 신앙진단지는 우선 그 구성이 7개 항목으로 세분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자세한 것은 밑의 신앙진단지를 참고하라) 1. 개인신상 2. 가족사항 3.신앙생활배경 4. 기본진리 5. 신앙생활 6. 개인생활 7.양육받고 싶은 분야 등이다.
이상과 같이 7개 분야로 접근하여 피진단자를 진단하여 신앙성장을 돕는데 그와 같은 7개분야로 설정하였는지 그 이유에 대해 간략히 설명한다. 그런데 지면관계상 간략하게 할 수 밖에 없는 점에 대해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다.
1) 개인신상에 관한 것
신앙진단을 하면서 개인신상을 물어본 것은 가장 객관적인 자료를 얻기 위함인데 그 중에서도 '미국에 온 때'를 물어보는 것은 미국에 온 연수에 따라 삶의 형태와 질이 대략적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가령, 이민온지 1년 되었다면 그 가정은 현재 이민생활 적응초기에 있는 것이고, 대략 어떤 문제에 봉착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서 목회적 신앙적 도움을 줄 수 있다.
2) 가족사항에 관한 것
가족사항에 대해 물으면서 직계가족 뿐 아니라 확대가족에 대한 것 까지 물은 이유는 피진단자의 신앙성장에 영향을 끼친 인물들을 좀 더 넓은 장에서 찾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 영향을 끼친 인물이 기독교 신자가 아니고 타종교의 신자였을지라도 그 사실을 미리 알면 향후 피진단자의 신앙성장을 돕는데 좋은 정보가 된다. 그리고 병원에서 가족질병역사를 조사하여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하는데 사용하는 것 처럼 피진단자의 가족의 신앙역사에 대해 아는 것은 좋은 자료가 된다.
3) 신앙생활 배경에 관한 것
피진단자의 신앙생활이 기독교에서 시작했을 수도 있고, 타종교에서 시작했을 수도 있다. 타종교의 신앙생활정도에 대한 정보도 유용하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어떤 인물이나 사건이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정보도 참고가 된다. 가령 사별의 아픔을 통해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면 그 사건은 일반적으로 지속적으로 피진단자에게 영향을 끼치는 요소가 되는데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신앙지도를 해야한다.
4) 기본진리에 관한 것
여기서 기본진리라고 할 때 성부하나님, 성자 예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말한다. 피진단자가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그리고 성령님에 대해서 어느 정도로 이해하고 있고, 또 믿고 있는지는 그 사람의 신앙을 진단하는 기본요소가 된다. 그리고 응답을 0에서 6사이의 어느 숫자를 택하는 라이커트 스케일을 이용해서 하게 했는데 그 이유는 예, 아니오 식의 단답형식 대답은 피진단자의 믿는 정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데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5) 신앙생활에 관한 것
여기서는 주로 구원의 확신과 사죄의 확신 등 확신에 대한 것을 진단하려 했고, 또 그리스도의 주님되심에 대해 파악하려 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로 선교에 관심이 있는지와 교회에 봉사할 마음이 있는지 여부를 진단하려고 했다. 신앙이 성숙한 사람은 확신과 그리스도의 주님되심이 분명한 사람이라는 전제하에서 접근해 보았다.
6) 개인생활에 관한 것
여기서는 자아상을 보는 관점과 인생과 현재 직업에 대한 만족도 그리고 타인을 보는 관점 등을 진단한다. 지난 호에서 언급한대로 신앙성숙을 전인적으로 볼 때 개인의 정서적 발달과 사회적 발달 그리고 도덕적 발달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현 진단지에서는 이 부분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인데 앞으로 새로운 진단지를 만들 때는 보도 심층적으로 다룰 생각이다.
7) 양육에 관한 것
이 분야는 피진단자가 스스로 생각할 때 더 배우고 싶거나 훈련받고 싶은 분야에 대해 선택하도록 했다. 개인에게 맞는 맞춤커리큘럼을 구성할 때 참고가 되며 또한 교회에서 주제별 특강이나 소그룹의 주제를 결정할 때 좋은 참고가 된다.
이상에서 현 사용중인 신앙진단지 구성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하였다. 앞으로 새로운 진단지를 만든다면 앞선 호에서 소개하였던 테드워드 교수의 손가락 비유에서 나온대로 인간의 다섯가지 발달측면, 즉 신체적, 지적, 정서적, 사회적, 그리고 도덕적 발달을 진단기준으로 하는 진단지를 만들고자 한다. 물론 그 기준들도 앞서 언급했드시 완벽한 것은 될 수 없다. 그러나 어느 정도 학문적으로 인정받은 기준들이므로 이 분야의 계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이제 다음 호에서는 이 진단지를 가지고 지역교회에서 어떻게 활용할 지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5. 신앙진단사역의 사례- 벧엘교회의 경우
지금까지 신앙진단사역의 필요성과 사역 철학과 신앙진단지 구성등에 대해 언급하였다. 이제 신앙진단지를 이용한 구체적인 사역을 소개할 때가 된 것 같다. 구체적인 사역의 한 예로서 필자는 벧엘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을 여과없이 그려보려고 한다. 아직 완전한 시스템이 구축된 것은 아니고, 현재 진행형이다. 허나 신앙진단사역에 대해 관심이 있으신 동료목회자님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기대하면서 지난 3년 간 벧엘교회에서 실행해본 신앙진단 사역을 소개하려고 한다.
벧엘교회에서 부임후 1년 쯤 후에 시작하다
앞서도 잠깐 언급했드시 필자는 2000년 8월에 현재 목회중인 벧엘교회(미국 메릴랜드소재)로 부임해 왔다. 신앙진단 사역을 벧엘교회에서 시작한 것은 부임 후 약 1년 쯤 지난 뒤였다.
신앙진단의 대상을 기존신자로 할 것인지, 아니면 새로오는 신자들을 대상으로 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당시 주일 출석인원이 성인 약 550-600여명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신앙진단지를 사용하여 진단을 하고, 또 그에 이어지는 맞춤교육을 실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결론은 새로오는 신자들을 대상으로 하기로 하였다.
실시하기에 앞서 교인들에게 설교시간을 이용하여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목회를 하겠다고 일종의 목회철학을 이야기 했다. 그렇게 이야기 할 때 필자의 의중에는 신앙진단을 통해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앙을 진단하여 각 사람을 성숙한 사람으로 돕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그리고 장로님들께 당회를 통하여 부연설명을 하였다. 물론 교인들이나 장로님들이 그 몇마디 말로 다 이해를 하신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한 것이 상담자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진단자들을 찾아 나서다
신앙진단 사역에서 진단자의 역할 부터 분명히 해야 할 것 같다. 필자의 원래 생각은 진단은 목회자가 해야 한다는 것 이다. 목회자가 교인 한사람 한사람을 진단지를 이용하여 진단하고, 그 진단에 근거하여 한 사람 한 사람을 대상으로 맞춤교육을 실시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진단사역으로 본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그런 일은 목회자들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벧엘교회의 현실은 그것이 불가능했다.
필자는 2000년 8월에 부임하여 두 분의 부목사님을 청빙하여 공동목회를 시도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가 양적으로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새로 등록하는 교인들의 등록심방 하기도 어려웠다. 그런 상황에서 새로 오는 교인들을 대상으로 목사들이 신앙진단을 하고, 또 한 사람 한 사람을 대상으로 맞춤교육을 실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었다. 그래서 고육지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 평신도 진단사역자들을 찾는 것이었다.
감사하게도 벧엘교회 내에는 전도폭발훈련을 받은 분들이 다수 있었다. 그리고 개인양육의 경험이 있는 분들도 있었다. 그런 분들이 있다는 것은 사실 이민교회로서는 흔치 않은 일이다. 의외로 이민교회는 60-70년대 한국교회의 형태를 고집하는 일이 많다. 이민 온 시기가 60년대이면 여전히 60년대의 한국교회형태를 고집하고, 70년대에 온 사람들은 70년대의 한국교회형태야 말로 지켜야 할 이상적인 교회 모습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90년대에 이민온 사람들은 한국교회의 달라진 모습, 특히 평신도들이 사역하는 모습에 익숙한 분들인데 이민교회의 목회자 중심의 목회모습에 당혹해하는 일이 종종 있다. 그런 일반적인 이민교회 현실에 비해 벧엘교회에는 훌륭한 평신도 사역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15명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분들을 대상으로 신앙진단이 무엇인지, 왜 하려고 하는지, 또 어떻게 하는 것인지 등에 대해 오리엔테이션을 실시 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역할은 신앙상담으로 국한할 것임을 설명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진단과 교육 등 신앙진단사역 전부를 위임하면 평신도들이므로 너무 부담스러워서 참여하지 않을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역할은 먼저 새로운 교인(피진단자)이 신앙진단지를 집에 가져가서 작성하여 가지고 오면 그 진단지를 살펴보고 그 피진단자와 만나서 현 신앙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럽게 상담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진단자들의 역할은 진단과 교육 중에서 진단이었다. 그 분들은 그 일을 맡아 약 2년여 동안 2004년 5월 현재 약 350여명을 진단하였다.
교육시스템을 구축하다
일단 진단하는 문제는 평신도 진단사역자들을 통해 해결이 되었는데 문제는 진단 후 교육(치료)이 문제였다. 앞서 언급했드시 이상적인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대상으로 성숙을 향한 커리큘럼을 작성하여 교육/훈련을 실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벧엘교회 현실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혹 현재 교회를 개척하는 목회자가 이 진단사역에 관심을 갖고 계시다면 아예 교회 초창기 부터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을 대상으로 이 사역을 펼치면 아름답고, 건강한 교회를 이룰 것으로 믿는다) 그래서 만든 것이 교육과 훈련 시스템이다. 현재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먼저, 새가족반이 있다. 이것은 6주코스인데 일년내내 쉼이 없이 돌아간다. 국제 제자훈련원에서 만든 새가족모임교재(옥한흠목사저)를 사용하여 5주를 하고, 6주째는 벧엘교회의 조직과 비전을 강의한다. 이 새가족반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신앙진단지를 소개하고 설명한다. 이 진단은 그들 자신의 영적 성숙을 위한 것임을 강조하고, 개인적인 정보유출은 없을 것임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새가족반을 수료하기 전에 진단지를 작성해서 교회에 가지고 올 것을 권한다. 일단 가지고 오면 연령과 성별 등을 고려하여 진단사역자들과 한 사람 한 사람을 연결시킨다. 그러면 진단사역자들이 그들을 개별적으로 만나 신앙상담을 하고 그 결과는 보고서를 작성하여 목회실에 리포트한다.
이 때 목회실에서는 두분의 목사님이 담당 교구에 따라 리포트를 보고 후속조치를 취한다. 가령, 특별히 개별상담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경우 개별상담을 실시한다.
주일교육클래스들을 활용하다
일단 신앙진단이 끝나고 목회실에 연결은 되었지만, 중요한 것은 진단에 근거한 교육/훈련이다. 일대일로 하는 개별양육이 현 벧엘교회에서는 불가능하므로 일단 주일 오전 10시부터 11시30분까지 1시간 30분간을 이용하여 기초교육반을 운영키로 하였다. 현재 기초교육반은 모두 세클래스인데 확신반, QT반, 그리고 7단계반이다. 확신반은 구원의 확신을 비롯하여 다섯가지 확신을 다루고, QT반에서는 경건의 시간을 훈련하며 7단계에서는 기초적인 교리 7가지를 가르친다. 각 클래스는 8주간 지속하는데 이 중 7단계는 필자가 벧엘교회에 부임하기 전 부터 그러니까 초대 담임목사이신 김상복 목사님께서 시작하신 클래스인데 그 동안 담당을 장로님들이 맡아서 해왔던 것이다. 이렇게 세반을 한 이유는 현재 사용중인 신앙진단지에서 확신과 경건의 시간과 그리고 기본진리에 대해 묻고 진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진단의 결과 확신이 부족하고, 경건의 시간이 부족하고, 기본진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이 세반을 일종의 후속조치성 교육/훈련으로 마련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진단 후 중요한 것은 교육/훈련(일종의 치료)인데 한 사람 한 사람을 개별적으로 하면 좋지만, 현 실정이 그렇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이렇게 클래스 형식으로 대치한 것이다.
제2차 진단
이상의 3 클래스를 마치는데 6개월 이상 걸린다. 그 세반을 다 마친 사람들을 대상으로 다시 진단하는데 교육의 결과 어느 정도로 성숙하게 되었는지를 측정하기 위함이다. 현재 시스템 상으로는 2차 진단까지만 하게 끔 되어있다. 아직은 2차 진단자들의 데타가 많지 않아서 그 결과를 제시하지 못하지만, 조만간 데타가 정리될 예정이다.
현재 시스템을 보완하기 위해서 일대일 양육을 준비 중에 있다. 진단사역자들을 중심으로 일대일 양육을 실시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서 이제 훈련시키려고 한다. 교회 규모가 크다고 해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개별적이고 인격적인 영적 돌봄을 받는 것이 필자가 꿈구는 목회이다. 그 일을 위해 현재 일대일 양육시스템을 구축하려고 하는 것이다. 앞으로 그 결과에 대해서 기회가 되면 다시 동역자들에게 제시하고 싶다. 다음 호에서는 이 시리즈의 마지막으로 신앙진단사역의 전망에 대해 필자의 생각을 피력하려고 한다.
바라기는 이제 초기단계에 있는 이 신앙진단사역에 뜻있는 동역자들이 함께 개발해 나가기 원한다. 그리고 이 신앙진단사역을 통해 한국교회의 성도들이 성숙한 성도들이 되고 또 교회마다 건강한 교회가 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주께 구한다.
6. 신앙진단 사역의 전망
지금까지 신앙진단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이제 앞으로 신앙진단사역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이제 일단락을 지으면서 새롭게 제기할 질문은 "과연 신앙진단이 가능한가?"이다.
여기에 대해 필자의 현시점에서의 대답은 Yes and No! 이다. 예스라고 한 것은 어느 정도 진단이 가능하다는 것이고, 노라고 한 것은 백퍼센트 다 진단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이것은 신앙의 속성때문이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신앙에 대한 정의는 목회자의 신학에 따라 다소 다를 수 있다. 그런데 필자가 속한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신앙은 지적, 정적, 의지적 삼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는다. 신앙이란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들었을 때 지적으로 예수님에 대해 알고, 정적으로는 그 분을 기뻐하고, 의지적으로는 그 분께 자기 자신을 맡기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신앙의 삼요소를 진단하는 문제
만일 이 정의를 받아들이고 신앙을 진단하려고 할 경우 어느 정도 진단이 가능하나 백퍼센트 다 진단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적, 정적, 의지적 삼요소 중 가장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는 것은 지적 요소이고, 나머지 정적요소와 의지적 요소는 진단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설명해 본다. 가령 한 사람의 새로운 성도가 교회에 들어왔다고 하자. 그러면 목사가 진단을 시도한다. 우선 신앙의 지적 요소, 즉 그 분이 어느 정도로 예수님( 넓게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는지 질문을 통해 진단할 수 있다.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해 아는지, 동정녀 탄생에 대해 아는지,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것을 아는지 등에 대해서 질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정적인 요소이다. 어느 정도로 주님을 기뻐하고, 사랑하는지에 대해서는 측정하기기 쉽지 않다. 예를 들어 엄마가 일곱살 된 딸 아이에게 묻는다.
"너 엄마 사랑하니?" "응" "얼만 큼?" "많이, 많이!" 이런 대화를 들어보셨을 것이다. 그 때 "많이, 많이!"는 어느 정도를 말하는가? 객관적 측정은 불가능하다. 다만 주관적으로 엄마가 느낄 뿐이다. 마찬가지로 신앙진단을 할 때 신앙의 정적요소로서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객관적으로 진단하기가 쉽지 않다.
한편, 의지적 요소는 진단하기가 어떤가? 여기서 한가지 언급할 것이 있다. 신앙의 의지적 요소에 대해 전통적으로 "신뢰"라고 하는데 비해서 필자는 "순종"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는 것이다. 큰 차이는 없으나 순종이 보다 적절한 듯 싶다. 사실을 말하면 이 단어는 필자의 트리니티 신학교의 은사이신 페리 다운즈의 용어이다. 그 분은 트리니티 신학교에서 몇 안되는 개혁주의 신학의 입장을 취한 교수 중의 한 분이시다. 그런데 그 분은 신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정의를 내리신다.
신앙이란 하나님을 알고(지적), 하나님을 사랑하고(정적),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의지적). 그러면 혹자는 물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의지적요소로 보아 오는 신뢰는 어디에 들어가는가? 그것은 정적요소에 포함시킨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자신을 맡긴다는 것이다. 기독교 교육학자인 다운즈 교수의 신앙에 대한 정의는 신앙을 진단하는데 보다 도움이 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진단에 있어서 "신뢰" 보다는 "순종"을 측정하기가 보다 용이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신뢰 보다는 순종이 객관적으로 보다 잘 관찰할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시 QT를 생각해 보자. QT를 가르칠 때 보통 적용을 강조한다. 그리고 적용은 추상적으로 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하라고 가르친다. 예를 들어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본문으로 했을 때 적용을 막연하게 "아, 이웃을 더욱 사랑해야지!"하고 적용을 했다면 잘못했다고 지적해준다. 보다 구체적으로 가족 중 어느 누구나, 아니면 이웃 중 누구, 친구 중 누구를 구체적으로 사랑하되, 그것도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서 사랑을 실천하라고 격려한다. 그런 점에서 QT가 신앙성장에 대단한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신앙은 순종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신앙진단시 순종을 측정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본다.
신앙진단이 가능한가? 라는 질문에 대한 지금까지의 답변을 정리해 보면, 앞서 언급했드시 Yes and No! 이다. 이것은 로렌스 콜벅의 도덕발달이론의 밑받침이 된 도덕 발달 측정이 안고 있는 문제점이기도 하다. 콜벅의 도덕발달 측정도 한 개인의 도덕수준을 측정했다기 보다는 한 개인의 도덕에 대한 지적이해를 측정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도덕적인 생각을 바르게 가지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도덕적으로 바르게 행동한다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콜벅의 측정은 도덕 행동을 측정한 것이 아니고, 도덕에 대한 생각을 측정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신앙진단도 역시 비슷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본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적 요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진단은 해야 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신앙의 삼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지적 요소라고 믿기 때문이다. 비록 지적요소에 대한 진단에 그친다 해도 그것은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갖는다고 본다. 성경에서 말하는 신앙은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믿는가가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타종교인들도 소위 신앙인이다. 즉 신적인 존재를 대상으로 의존하고, 순종하고 섬기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신앙의 내용이 다르다. 즉 누구를 경외하고, 무엇을 믿는가가 중요하다. 기독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앙의 내용 중 특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지적요소인데 이것이 전제되지 않은 한 하나님께 대한 바른 사랑과 하나님께의 바른 순종은 있을 수가 없다.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지만, 우선 지적 내용이 잘못되어 있는 한 감정적 요소와 의지적 요소는 빗나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필자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신앙진단질문지도 다소 신앙의 "지적인 요소"의 진단에 치우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앞으로 정적, 의지적인 요소를 진단할 수 있는 질문지가 나오기를 기대한다. 특히 교육학을 전공하신 목회자들의 연구를 기대해 본다. 교육에서도 학생들의 성취를 측정할 때 시험을 보는데 그것이 사실은 대부분 지적인 측면에서의 평가에 머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나라 학교교육의 경우 더욱더 지적인 평가로 학생들을 판단하는 것이 사실이다. 예술이나 체육등에서 탁월한 학생들 보다는 지적인 분야에서 소위 많이 알고 있는 학생들을 우수하다고 보는 견해가 우리사회에 전통적으로 지배적이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가장 성경을 잘 알고, 가장 교리를 잘 아는 사람인 목사가 교회 안에서는 신앙이 가장 좋은 사람이라는 통념이 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사실일까?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예를 들어서 안됐지만, 한국의 의사들의 건강 수준은 C 정도라는 보도를 본적이 있다. 의사들은 어떻게 하면 건강할지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일반인 보다 많이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실천하지는 않는다는 얘기이다. 목회자들의 경우도 이와 같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그런데 형편이 그렇다고 해도 역시 아는 것은 중요하다. 알지 못하면 행할 수 없다. 그래서 성경은 말한다.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사람이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확신했을 때이다. 확신하기 위해서는 반복 교육과 경험이 필요하다. 한번 행해서 경험한 일은 확신한다. 그래서 의지적으로 순종을 실천토록 하는 QT는 대단히 중요한 훈련이다.
이제 마무리를 짓도록 하자. 신앙진단 사역은 교회에 반드시 필요한 사역이라고 믿는다. 이것이 정착하기 위해서는 정선된 신앙진단지가 많이 나와야 한다. 신앙의 지적요소 뿐 아니라 정적, 의지적 요소도 잘 진단할 수 있는 진단지가 계발되어야 한다. 그리고 각 교단 별로, 다른 말로는 각 신학적 입장 별로 신앙진단지가 만들어 지면 좋겠다. 각 신학적 입장에 따라 소위 건강한 신앙인에 대한 기준이 약간씩 다르기 때문이다. 모든 목회자들이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에 따라 선택한 신앙진단지를 사용하여 개 교회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영적상태를 진단하여 각 사람이 영적으로 건강하고 성숙한 사람이 돕도록 하는 인격적인 맞춤목회가 이루어지면 좋겠다. 지금까지 졸고를 읽어주신 목회자님들께 심심한 사의를 표한다. 필자는 한 사람의 지역교회 목회자로서 목양의 짐을 함께 지고 가는 동역자들에게 신앙진단에 대한 소개를 해드린 것으로 만족하고 싶다. 많은 목회자들이 이것이 계기가 되어 조금이나마 목회사역에 새로운 빛과 희망을 찾게 된다면 필자로서는 다만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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